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흐 바웬사 (문단 편집) == 생애 == [[폴란드]] 북부 [[그단스크]][* [[독일]] 이름인 단치히(Danzig)로도 알려져 있다 전쟁사에서는 지난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된 곳으로도 유명한 곳.]-레닌 [[조선소]]에서 조선공으로 일하던 중, 1980년 폴란드 정부가 공장의 노동자들을 단체로 해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웬사는 이에 저항하면서 실질적 노동자 대표로 그단스크-소포트-그디니아 지역의 노동자 총 파업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 [[공산주의]] 체제가 허용하지 않는 자율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노조는 폴란드 연대노조('''[[솔리다르노시치]]''')[* 한국에서는 보통 '연대노조'라고 하는데 연대노조의 정식명칭은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Niezależny Samorządny Związek Zawodowy "Solidarność", NSZZ "Solidarność")'''다.]라고 불리고 바웬사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연대노조가 워낙에 강력하여 정부조차 협상 대표로 바웬사를 인정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1956년에 포즈난 항쟁으로 정권을 한번 갈아엎은 경험이 한번 있었고,[* 포즈난 항쟁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이후에 집권당내에서 파벌이 교체되었다.] 1970년에 또 한번 뒤엎은 경험이 있었던 데다가 [[가톨릭교회]]의 영향력도 상당했기에[* 게다가 불과 2년 전인 1978년 바티칸은 폴란드 출신의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그가 바로 [[요한 바오로 2세]]다.] 자유노조를 때려잡았다가는 정권이 다시 갈아엎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전의 선례가 이미 존재했으니 때려잡기가 힘들었던 셈인데, 이 때문에 당시 폴란드 정부에서 악명을 떨쳐가면서까지 차마 자유노조를 갈아엎지 못하고 체제내에 편입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 [[동유럽]] 국가에 줄 혼란을 막기 위해 [[소련]]의 압력을 받은 폴란드 군부는 1981년 [[12월 13일]]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 지도부를 내쫓고 바웬사 등 노동운동가들을 체포하였다. 이 때 서기장이 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자유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했는데, 나중에 그가 회고한 바로는, 자유노조의 세력이 강해지면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프라하의 봄|소련군이 직접]] [[헝가리 혁명|나서겠다는 소련의 협박]]을 받고, [[소련군]]이 폴란드를 장악하느니 폴란드인 스스로 문제를 정리하자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야루젤스키 자신은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이 때문에 [[시력]]에 치명타를 입은 전적이 있다.] 그 후 바웬사는 1년간의 가택연금을 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연대노조를 지원하는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공산권 간에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교황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토로했다. 가택연금 직후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로 자신의 [[자서전]]을 몰래 보내 <희망의 길 Un Chemin d'Espoir>를 발매했으며 이는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련 등의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자들의 문제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폴란드의 사회운동가로 손꼽히던 그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을 통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에 기여했다. 이후 공산당과 자유노조의 원탁회의를 거쳐 헌법을 수정해 일부 의석에 대해 자유총선이 실시되고 대통령직을 신설해 초대 대통령으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간선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야루젤스키는 공산당(통일노동당)의 인사를 총리로 임명하려다 자유노조의 반발을 사 철회되고 자유노조 인사를 총리에 임명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어 급속도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5년까지 [[폴란드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당시 정책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 [[폴란드/경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 지역 탈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초기임을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다. 구 유고, 소련의 구성국이나 혁명을 겪은 루마니아는 물론 탈사회주의과정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폴란드를 비롯한 중부유럽 국가들도 체제전환 초기인 90년대 초에는 모두 경기침체를 겪었다. 폴란드의 90년대 경제문제는 탈사회주의 국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바웬사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지만, 구조적인 문제의 책임까지 바웬사에게 전적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와는 별개로 바웬사는 결국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후보에게 패배했으며, 대선 패배로 연임에 실패하여 퇴임하면서 모든 퇴임 대통령의 권리를 포기한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토크쇼 MC 등을 본다고 한다. 그래도 그 동안 폴란드 경제에 짐이 된 외채를 탕감시킨 것 자체는 높이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대통령 재직 시절 바웬사가 펼쳤던 정책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폴란드에서 이전에 두번의 선례가 있었다. 고무우카는 1956년 포즈난 항쟁으로 스탈린주의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인물이었지만 집권 후반에 무능한 독재자로 전락하면서 인민들의 지지가 추락한 끝에 1970년 민중붕기로 물러났고, 고무우카를 축출하면서 집권한 기에레크는 초기에 경기호황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오일쇼크와 외채문제가 터지면서 역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물론 대통령 재임시의 정책과는 별개로 그가 폴란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한 것은 많은 폴란드 국민들과 역사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혁명과 국정운영은 전혀 별개의 직책이라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에서 군부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지도자였지만, 대통령으로는 [[IMF 외환위기]] 등으로 평가가 부정적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 끝까지 박수받으며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독재자가 된 영웅|독재자로 타락하지 않고]] 깔끔하게 은퇴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